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스타프 말러 (문단 편집) == 기타 == * 말러의 음악은 대부분이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인지 20세기 중반까지 많이 연주되지는 않았다.[* SP는 플레잉 타임상 한계가 있었다. 약 50~100분의 말러의 교향곡들을 담기에는 쉽지 않은 매체. 어느정도 말러 르네상스는 녹음 매체와 기술의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상 8번 교향곡의 경우는 1950년 이전의 녹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향곡 9번만 해도 벌써 약 80분에 달하는데 처음에 CD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에는 40분대로 두장에 나눠 발매했으나 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는 80여분에 달하는 9번을 한 장에 담은 중가반이 발매됐다.] 하지만 녹음기술의 발달에 따라 점점 자주 연주되고 녹음되었으며 일시적인 유행이나 재발굴, 열광의 수준을 넘어 현재 전세계 오케스트라들이 일상적으로 자주 연주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부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부천필]]의 말러 사이클이 큰 주목을 받았으며 2011~2012년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이 말러 전곡 연주 시리즈를 진행했다.[* 이때 연주된 말러 교향곡 10번 전악장(데릭 쿡의 2번째 판본)이 대한민국 초연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모든 교향곡을 연주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휘는 상임지휘자이던 [[정명훈]]이 진행했지만, 교향곡 7번과 대지의 노래의 경우는 부지휘자인 [[성시연]](전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이, 교향곡 10번은 제임스 드프리스트가 지휘를 맡았다.][* 10번 교향곡은 엄밀히 말하면 미완성이라 논외로 하고, 말러를 그렇게 좋아하는 정명훈이 아직까지도 7번은 단 한차례도 지휘한 적이 없다. 이유는 불분명.] 다만 오해하면 안 될 게 후술할 바와 같이 작곡가 말러는 사후에 한동안 잊혀진 상태는 결코 아니었다. 당장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2번, 4번, 대지의 노래, 9번의 전곡 음반 각각 1종과 5번 4악장의 발췌 음반 2종이 [[SP]]로 발매된 바가 있는데, 정확히는 2번은 무려 '''1921년'''에 말러의 지인이었던 오스카 프리트가 '''어쿠스틱 녹음으로''' 녹음했고,[* 이게 어느 정도냐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베토벤)|교향곡 9번]]도 처음으로 전곡 녹음된 것이 말러 2번 전곡 녹음 2년 후인 1923년이었다. 사족으로 이 녹음을 지휘한 사람은 1908년에 [[카르멘]]을 전곡 녹음한 독일의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브루노 자이들러-윙클러(Bruno Seidler-Winkler, 1880~1960).] 4번은 한술 더 떠 1930년에 무려 '''일본인 지휘자인''' [[고노에 히데마로]]가 녹음했으며, 대지의 노래와 9번은 [[브루노 발터]]가 각각 1936/1938년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녹음했고, 이후에도 1939년에 [[NBC 교향악단]]과 1번의 전곡 방송 녹음을 남긴 바가 있다. 그리고 5번 4악장은 빌럼 멩엘베르흐와 브루노 발터가 각각 1926/1938년에 녹음한 적이 있다. 애초에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작곡가 말러가 잊혀진 사람이었다면, SP 시대에만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 무려 '''4개'''[* [[대지의 노래]]를 교향곡으로 간주하는 경우]나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당시 클래식의 변방이었던 일본에서도 전곡 녹음을 시도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어떻게 보면 19세기 초까지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처럼 사후 한동안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끌었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 장녀인 마리아 안나의 죽음 이후 말러 부부는 사이가 멀어졌다고 전해진다. 말러는 빈 궁정 가극단에서의 자리를 사임하고 새로운 환경을 위해 미국 뉴욕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가극단으로 향했는데, 이곳에서 알마는 아이를 유산하는 등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경험한다. 결국 미국에 적응하지 못한 알마는 1910년 여름, 오스트리아 그라츠 근교의 작은 도시로 작은 딸과 함께 요양을 떠났고, 그곳에서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를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로피우스는 한 통의 편지를 말러 앞으로 보내 자신과 알마의 관계를 고백하게 된다.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말러는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했지만 끝내 알마의 마음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말러가 사망한 후 알마는 코코슈카라는 화가와 염문을 뿌리기도 하고, 옛 애인인 그로피우스와 정식으로 결혼하기도 했다. 새로운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중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과 사랑에 빠진 그녀는 그로피우스와 이혼하고 1929년 프란츠와 다시 결혼했다. * [[토마스 만]]의 소설인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말러에게서 영감을 받은 소설로 알려져 있다. 만이 베네치아에 여행을 갔었는데 현지에서 친분이 있었던 말러의 부고를 듣게 되었고 그때 영감을 받아 집필했다고 한다. 동명 소설을 1971년에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영화화했다. 이 영화에서는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에서도 쓰인 말러 5번 4악장이 주요 영화 음악으로 인상적으로 쓰였다. 영화 촬영장에서 5번 4악장을 계속 틀어놓았는데 비스콘티 감독이 이 음악이 누구 것인지 모르고 '음악이 좋은데 작곡가를 소개시켜달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 비록 남아있는 사진은 없지만, 알프레드 롤러의 회고에 의하면 상당한 근육질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말러는 많은 운동을 즐겨하던 사람이었으니 근육질인게 당연할 듯도 하지만. 그리고 사실 지휘자한테는 체력이 무척 중요하기도 하다.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셔터 아일랜드]]에 말러의 피아노 4중주가 주요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한다. * 애니메이션 [[은하영웅전설]]의 OST는 각종 클래식의 명곡으로 채워져 있으나, 그 중에서도 말러의 분량은 독보적이다. 은영전은 말러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애니이다. * 말러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말러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정신병을 앓았으며, 말러의 15명의 형제 중 8명을 일찍 잃었다. 게다가 그의 가족 중에는 맹인도 있고 정신병과 뇌종양을 앓거나 권총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말러의 조울증과 강박신경증 등은 어린 시절에서 유래한 듯하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Mahler, Gustav 항목에 의하면, 어머니에 대한 고착이 있었다. 절름발이였던 어머니를 흉내내 무의식적으로 다리를 약간 저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 말러는 작품을 쓰면서 언제나 고민하고 갈등했던 작곡가이며, 그의 교향곡들은 그의 실험정신의 결과이다. 그는 조성을 거의 무조성의 경계까지 몰고 감으로써 교향곡이 갖는 조성감각을 거의 무력화시켰다. 말러가 교향곡을 최종적 해체지점까지 확장시켰다고 평가되는 이유이며, 쇤베르크나 베베른 같은 다음 세대 작곡가에게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망치]]를 타악기로서 기용하는 등의 실험도 했었다. 말러가 현대음악 등장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현대음악의 시초라 볼 수 있는 무조성의 음악을 확립한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말러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말러는 멘토로서 그를 긴밀히 이끌어주었다.] 이런 이유로 '말러는 그가 죽은 이후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완벽히 부활했다. '나의 시대는 올 것'이라는 그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는 식의 [[말레리안]]들의 설명[* 주로 말러의 예언자적 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런 설명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은 이런저런 의미에서 어폐가 있다. 이미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생전에 광적인 팬덤을 주렁주렁 거느리며 군림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이 말러가 작곡해서 남긴 작품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안 가졌을 리도 없고, 20세기 전반에 걸쳐 말러의 작품들은 '흥미로운 현대음악'으로서 많이 연구되었다. 1960년대 이후로 '말러의 음악이 부활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적인 레퍼토리로서 재조명되었다는 의미에 가깝다. 당장 [[아르놀트 쇤베르크]]/[[알반 베르크]]/[[안톤 베베른]]부터가 말러의 숭배자로서 사후에도 여러 오마주를 남겼고, 여러 독일 작곡가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던 데다가 상술한 것처럼 작곡가 말러가 잊혀졌다는 시기인 2차 대전 전에도 말러 교향곡 전곡 녹음이 4개[* 브루노 발터의 1939년 1번 녹음은 방송용 녹음이었기에 발터의 사후에 발매되었다.]나 발매된 판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먼 소련 땅에서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어린 시절부터 말러를 숭배하여 그의 교향곡 세계를 계승하는 듯한 작품 행보를 보이게 되었는데, '말러가 20세기 전반에 묻혔다'면 애초에 그게 가능했을 리도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오래 묻혔다가 1960년대에 부활했다'는 설명에 부합하는 작곡가는 [[찰스 아이브스]]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아이브스는 음악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보험회사 사장으로 일하며 곡을 썼던 데다가, 음악이 워낙 독창적이여서 생전에 대다수의 작품이 몰이해를 받으며 연주되지 못했다.]. ||[youtube(PScJkkQPwwE, width=480, height=240)] || ||'''구스타프 말러의 피아노 연주 녹음''' || * 말러의 지휘 녹음은 단 1장도 남아있지 않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말러가 남긴 녹음이 아예 없지는 않다. 정확히는 1905년 11월에 자동피아노용으로 4개의 롤지에 연주를 기록한 것이며 음반으로 [[https://www.amazon.com/s?k=mahler+plays+mahler&crid=23W16H3I77P2O&sprefix=mahler+plays+%2Caps%2C308&ref=nb_sb_ss_i_1_13|출반]]되어 있다. 말러가 롤지에 기록한 4곡은 모두 자작곡으로,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2곡 '아침에 들판을 거닐면', 20대 초반에 쓴 가곡 '나 즐거이 푸른 숲을 지나며', 교향곡 4번 4악장과 교향곡 5번 1악장 피아노 편곡이다. 말러가 남긴 유일한 녹음 기록이기 때문에 가치가 매우 높은 역사적인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았으면 선배인 [[아르투르 니키슈]]처럼 빈약하게나마 오케스트라 지휘 녹음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말러의 생전이던 1910년에 프리드리히 카르크(Friedrich Kark, 1869~1939)라는 지휘자가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베토벤)|교향곡 5번]]을 축음기에 녹음하기도 했다.] * 말러의 교향곡 악보를 보면 템포 지시와 악상기호, 악기 연주 시 유의 사항 등이 다른 작곡가들의 교향곡에 비해 '''매우''' 세밀하게 적혀 있는데, 이는 말러가 지휘자로서 연륜이 깊었다 보니 자신의 곡이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울릴지에 대한 [[완벽주의]]에 시달린 것의 산물이다.[* 이와 비슷하게 말러와 똑같은 명지휘자이기도 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곡들도 관현악법과 세부적인 성부 구성이 매우 세밀한 것으로 유명하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브루크너 스타일의 교향곡 3곡과 피아노 협주곡 1곡을 남긴 수준급의 작곡가이기도 했다)도 말러만큼은 아니었어도 자신의 작품에 템포 지시와 악상기호를 세밀하게 지시한 것은 물론 어느 면에서는 슈트라우스 이성으로 세밀하게 성부를 짰다.] * 독일 출신의 후배 지휘자 겸 작곡가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도 비슷한 점이 많다. 실제로 말러와 푸르트벵글러는 원래 작곡가 지망생이었지만 생계 문제로 지휘자로 전향했고, 스스로를 '지휘도 하는 작곡가'로 여겼지만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작곡가로서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하는 대신 전설적인 지휘자로서 더 유명했으며 작곡가로서 무시당하던 오랜 기간 동안 둘을 멘토로 섬기는 지휘자들이 그들의 작품들을 홍보하고 다니기도 했으나[* 실제로 젊었을 적에 말러의 조수였던 [[브루노 발터]]와 [[오토 클렘페러]]는 말러의 교향곡을 적극적으로 연주했으며, 푸르트벵글러를 존경하던 [[예후디 메뉴인]]과 [[다니엘 바렌보임]]도 푸르트벵글러의 교향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다른 명지휘자가 작곡한 작품을 깔보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로 말러는 [[브루노 발터]]가 작곡한 교향곡을 발터가 자기 앞에서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알마한테 "아무래도 발터는 지휘자로서의 활동에 집중해야 할 것이며 이에 당신도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편지를 보냈으며, 푸르트벵글러도 [[라파엘 쿠벨릭]]이 지휘한 말러의 교향곡 5번을 듣고는 대기실로 찾아가 쿠벨릭에게 "연주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서 연주할 만한 곡인지 모르겠군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이미 대중적인 작곡가가 된 말러와 달리 작곡가로서의 푸르트벵글러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매우 낮다. * 국적은 보통 [[오스트리아]]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뉴질랜드]] 출신 화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도 일반적으로는 영국 국적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태어난 곳이 현재 [[체코]]라 그런지 체코에서도 체코계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에서 국적에 대해 모호하게 대한 걸 두고 유태인이니 이스라엘인이라고 주장하는 점도 있다. 그나마 [[프란츠 카프카]]처럼 왜곡하지 않지만 말이다. [[분류:체코의 작곡가]][[분류:오스트리아의 작곡가]][[분류:오스트리아의 지휘자]][[분류:1860년 출생]][[분류:1911년 사망]][[분류:후기 낭만주의의 작곡가]][[분류:유대계 오스트리아인]][[분류:오스트리아의 가톨릭 신자]][[분류:비소치나 주 출신 인물]][[분류:빈 대학교 출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